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손기양은 1588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성주의 주학교수에 임명되었다.
이때 성주에 살고 있던 정구를 찾아갔고 이후 빈번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
을 강마했다. 손기양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고
지방관으로 왜군을 막는데 힘썼다. 이 과정에서 경상좌도의 퇴계학파 인물인
정경세・조호익・이윤우・이전・이준・성안의・신지제・여대로・조정・서사원・이후
경・손처눌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.
손기양은 조정의 당쟁이 심화되자 1609년 창원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
고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해 점필서원을 중수하고 밀양향교를 재건하였으며, 밀
양사림을 대표해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촉구하는 등 향촌사회 질서를 안정시키
고자 노력했다.
손기양 사후 그의 후손들은 유고를 정리하고 유허를 정비하였는데, 이 과정
에서 손기양의 퇴계학파 내 위상을 정립하고 학문적 권위를 형성하기 위해 노
력했다. ‘이황-정구-허목’으로 이어지는 근기 남인 계보의 핵심 인물인 이익에
게 손기양의 행장을, ‘이황-김성일-장흥효-이현일-이재’로 이어지는 영남 남
인의 핵심 인물인 이상정・이광정 형제에게 『오한집』 교정과 서문을 부탁했다.
한편, 칠탄서원을 건립하고 손기양을 향사하는 과정에서 이상정 이후 영남
남인을 대표하는 학자인 류치명은 「칠탄서원봉안문」과 「상향축문」을 지었으며,
이황의 10세 종손인 이휘녕은 「칠탄서원청절사상량문」을 지었는데, 이들은 퇴
계학파 내에서 칠탄서원 건립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.
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기양은 퇴계학파 그중에서도 한강 정구 문인이자 밀양
을 대표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.